안녕하세요, 에디터 H입니다!
벌써 20세기의 마지막 이야기!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1990년대
복잡성 속의 자율성
1990년대는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완전히 막을 내리면서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가 확립된 시기였습니다. 공산주의의 퇴조와 자유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의 확산을 의미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이념 대결보다는 경제적 협력과 경쟁이 중요해졌고, 인터넷과 IT 기술의 발전은 이 모든 변화를 가속화하며 정보화 사회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1990년대 중반까지 반도체 산업의 성장 등 높은 경제 성장을 누리던 중 1997년 외환위기를 맞닥뜨리며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강력한 구조조정과 경제 시스템의 변화(신자유주의적 개혁)를 가져왔습니다. 건축은 기능주의의 족쇄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개념과 예술적 비전이 지배하는 격변기였습니다. 건축은 과연 어떻게 해체되었고, 무엇을 새롭게 구축했는지, 다섯 개의 상징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심층적으로 탐험해 보겠습니다!


형태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술의 발전
해체주의는 모더니즘 건축이 추구했던 '순수함', '명확성', '완전성'을 상징하는 수직적 질서와 위계를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대신, 건축적 요소의 파편화와 비직교적인 형태를 통해 통제된 혼란을 디자인하며, 수평적 네트워크와 비위계적 구조인 '리좀(Rhizome)'의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건축가의 무한한 창조력은 순전히 첨단 건축 시공 및 공학 기술의 발전 덕분에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해졌습니다. 기술이 형태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건축은 기능이나 합리성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개념과 형태를 극한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공간을 채우는 한 편의 예술 설치물'로 격상되었던 것이죠. 이 시기는 건축이 '문제 해결의 도구'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개체'로 진화하는 과정의 극적인 구현이었습니다.
도시의 복잡성을 압축한 사각형 프리즘, 교차 프로그래밍과 경사로의 시학
쿤스트할
(로테르담, 렘 쿨하스, 1992)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위치한 쿤스트할(Kunsthal)은 렘 쿨하스(Rem Koolhaas 1944~)에게 있어 그를 21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된 건축 작품입니다. 1992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3300m²의 전시 공간과 강당, 레스토랑을 하나의 컴팩트한 직사각형 디자인에 통합했습니다. 쿤스트할은 로테르담의 문화적 중심지인 뮤지엄 파크의 관문이 되도록 의도하였는데, 이는 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도시를 문화 중심지로 재생시키고자 했던 1990년대 로테르담 시의 강력한 문화 투자 의지를 반영합니다.



쿤스트할 대지는 매우 이중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쪽 경계는 고속도로 앞에 위치해 있었고, 북쪽은 한 층 낮은 뮤지엄 파크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쿨하스는 이 상반된 도시 맥락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건물 내부적으로 두 개의 경로가 교차하도록 구상한 것입니다. 하나는 동서 방향의 도로였고, 다른 하나는 뮤지엄 파크의 남북 축을 확장하는 공공 경사로였습니다. 이 경사로와 경사진 바닥 평면은 세 개의 대형 전시실과 두 개의 작은 갤러리를 끊김 없이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방문객들에게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연속적인 동선을 제공합니다.




건물의 사각형 영역에 두 개의 교차로가 생기고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렘 쿨하스는 '네 개의 자율적인 프로젝트'이면서도 궁극적으로 '연속적인 나선형(Spiral)'을 이루는 뮤지엄을 설계한 것 입니다. 이러한 프로그램과 동선의 의도적인 파편화 및 재조합, 즉 크로스 프로그래밍(Cross-Programming)을 통해 모더니즘의 명확성 대신, 비계층적이고 수평적인 네트워크 구조를 건축화 했습니다. 현대 도시의 복잡성을 흡수하고 압축하는 '기능적 기계'를 건축화한 아주 획기적인 사례이죠.
콘크리트로 빚은 역동적인 조각
비트라 소방서
(바일 암 라인, 자하 하디드, 1993)
비트라 소방서는 이라크 출신의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가 설계한 건축이자, 1990년대 해체주의 건축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평가받는 결정적인 예시입니다. 1981년 대형 화재로 공장 일부가 파괴된 후, 가구 회사 비트라(Vitra)는 자체 소방대를 위해 이 건물을 의뢰했으며, 1991년 착공하여 199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그녀의 개념적 비전을 물리적 현실로 구현한 첫번째 프로젝트입니다.


비트라 소방서는 모더니즘 건축의 직각과 명료함을 완전히 거부였습니다. 건물은 노출된 철근 콘크리트로 현장에서 타설되었으며, 색상이 없고 직각이 부재하여 방문객에게 매우 이례적인 공간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 건물은 '선형적이고 층을 이룬 일련의 벽'으로 공간을 점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공간을 정의하는 것에 중점을 두며, 날카롭게 각진 평면과 대각선 공간의 지배가 특징입니다. 이러한 기하학적 디자인은 마치 인접한 생산 시설의 각진 특징과 나란히 배치되어 '정지된 폭발'과 같은 운동감과 모멘텀을 시각적으로 부여했습니다.



비트라 소방서는 건축적인 순수 형태의 구현에 성공했지만, 이와 동시에 기능적 효율성 측면에서 큰 모순을 드러냈답니다. 소방관들이 실제 소방서의 목적에 맞게 건물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비트라 사는 완공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체 소방대를 해산하게 됩니다. 이 건축적 아이러니는 1990년대 해체주의의 극단적인 선언을 상징합니다. 모더니즘의 금언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개념적, 미학적 비전이 기능적 요구보다 우선하는 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확립한 것입니다. 비트라 소방서는 기능적으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각적, 개념적 충격 덕분에 자하 하디드가 2004년 프리츠커상을 받고 세계적인 스타키텍트로 인정받는 결정적인 아이콘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의 상흔을 공간화
베를린 유태인 뮤지엄
(베를린, 다니엘 리베스킨트 1999)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 1946~)가 설계한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Jewish Museum)은 1989년에 설계를 시작하여 1993년에 완공되었는데 (개관은 2001년) 유대인이 겪은 홀로코스트의 고통과 단절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건물은 전통적인 박물관과는 달리, 강렬한 지그재그 또는 번개 모양의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전시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관람객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적 역사를 직접 감각적으로 체험하도록 강요하는 장치입니다. 박물관 동선은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각 축은 유대인 역사의 다른 측면을 상징합니다. 일직선의 연속된 계단은 역사의 연속성을 제시하였고, 호프만 가든 (The Garden of Exile)은 베를린을 떠나야 했던 유대인 망명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입니다.
관람객은 이곳에서 잠시 하늘로 트인 듯한 '자유'를 느끼려 하지만, 결국 망명이라는 현실이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다시 지하의 어둠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홀로코스트 보이드 (Holocaust Void)는 대학살을 상징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22m 높이의 천장에 난 작은 틈에서 스며드는 빛만이 존재합니다. 이 공간은 막막함과 압도적인 어둠을 통해 희생자들의 고립된 공포를 재현합니다.




박물관의 또 다른 중심인 메모리 보이드(Memory Void) 에는 이스라엘 예술가 메나슈 카디시만이 만든 1만 개의 둥근 금속판 조각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이 금속판들은 마치 사람의 얼굴 형상을 연상시키는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관람객이 이 쇳덩이 위를 밟고 지나갈 때, 금속이 부딪히는 끔찍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 소음은 방문객들에게 희생자들에게 다시 한번 고통을 가하는 '가해자'가 된 듯한 압도적인 감각적 체험을 강요합니다. 리베스킨트의 해체는 단순히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윤리적, 역사적 서사를 담아냅니다.
펼쳐진 네 권의 책타워와 중심의 도시숲
프랑스 국립도서관
( 파리, 도미니크 페로, 1995)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진행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Grands Projects) 중 하나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세워지게 됩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국제현상설계에서 당선된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 1953~)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한국에는 이화여대 캠퍼스(ECC) 설계를 하기도 했습니다.

건축물의 디자인은 '펼쳐진 책' 모양을 상징하는 거대한 네 개의 80미터 타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타워들은 파리의 스카이라인에 강력한 지식과 국가적 권위의 상징을 새겨 넣었습니다. 4개의 거대한 타워로 둘러싸인 중앙에 '숲 정원(Forest Garden)'을 배치한 것이 큰 특징입니다. 이 정원은 지하 도서관 내부 공간에 자연 환기와 빛을 제공하게 됩니다.




한편 이 건물은 기능적으로 역설적인 배치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상징적으로 지어진 지상으로 네 개의 '책 모양' 타워는 대부분 사무 공간으로 사용 되었고, 건물의 핵심인 서고는 안전과 보존을 위해 건물 중앙의 가장 낮은 곳(지하)에 배치되었으며,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스틸 핀으로 구성된 커튼월을 통해 지하 공간에도 충분한 빛을 반사시켜 아늑한 분위기를 유지하게 했습니다.
민중의 시선으로 도시를 직시
한겨레 신문사 사옥
(서울, 조건영, 1991)
1991년 완공된 한겨레 신문사 사옥은 1990년대 초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당대의 흐름을 포착한 중요한 전환기적 건축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시기는 군사정권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급변기였습니다. 조건영 건축가는 군사정권이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주체였던 '민중’의 정신을 건축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외관 전면부에 노출된 수직, 수평 구조물은 신문사가 추구하는 투명성과 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구에서 하이테크 건축이 기술적 낙관주의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 달리, 한겨레 사옥이 외부 노출 구조라는 글로벌 건축 형식을 한국 사회의 급변하는 맥락에 맞춰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용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1990년대 한국 건축은 서구 사조의 단순 수용을 넘어선 한국적 비판 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다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돌출 구조가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번성에 따른 다른 상업 건물에서도 단순히 양식적인 요소로 이용되면서, 본래 담고 있던 정신은 다소 희석되게 됩니다. 이 사례는 건축물이 특정 시대의 정치적 의지를 기록한 역사적 매체이지만, 사회적 맥락과 분리될 때 그 초기 이데올로기적 힘을 잃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조건영 건축가의 또 다른 대표작인 대학로의 JS 빌딩도 주목할만한데, 현재는 하늘을 찌를 듯한 콘크리트의 조형성은 잘려 변형되어 그 시대적 의도는 박재가 되어버려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해체의 유산 1990년대를 넘어 21세기로
1990년대의 건축은 기능과 효율을 넘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시대였습니다. 쿤스트할의 프로그램 실험, 비트라 소방서의 형태 실험, 유태인 뮤지엄의 서사적 공간처럼, 건축은 그 자체로 철학과 감정, 그리고 시대의 기억을 담는 매체가 되었죠. 그리고 그 감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SANAA의 21세기 미술관처럼 공간은 더 부드러워지고 자유롭게 열려 있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어요. 결국 1990년대는 건축이 ‘틀을 깨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출발점이었습니다.

다음편은,
드디어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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