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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C Tech

[HEC Tech] 1970, 건축의 이상의 현실 (W.홍재승)

 

 

안녕하세요, 에디터 H입니다!

 

벌써 6번째 이야기~

지금 바로 떠나볼게요

(1, 2, 3, 4 5)

 


 

 

‘1970년대’

격변의 세계와 건축의 전환점

 

 

(좌) 1970년대 오일 쇼크 당시 주유소 / 출처: Wikimedia Commons (우) 베트남 전쟁떄 파병(1966)된 백마부대 병사 / 출처: 홍장희 아카이브

 

이 시기는 전 세계가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던 시기였어요. 베트남 전쟁(1955-1975)의 종전과 특히 1973년 오일 쇼크는 전 세계 경제를 흔들었고, 건축이 환경과 경제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답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었어요. 한편 1968년 전 세계를 휩쓴 학생 운동의 여파는 건축 교육과 실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져왔어요. 건축 학생들은 기존 학교의 폐쇄성을 비판하며 도시의 문제에 직접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사회적, 생태적 도전에 대한 다학제적 접근을 강조했답니다.

 

 

모더니즘의 위기와 새로운 흐름의 태동

전쟁 후 도시를 다시 짓고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모더니즘 건축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특히 똑같고 거대한 기능주의 건물들이 도시 문제의 원인이 된다는 비판이 많아지면서, 건축가들은 새로운 디자인과 기술, 그리고 사람을 위한 공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모더니즘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상업적인 개발자들 때문에 변질되거나 사회를 더 좋게 만들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어요…!

 

실패에 대한 반성은 새로움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었죠 건축계에는 새로운 시도와 자유로운 표현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요, 하나의 건축 스타일만 고집하던 시대가 끝나고, 후기 모더니즘, 브루탈리즘, 신형식주의, 하이테크 건축,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정말 다양한 건축 스타일이 한꺼번에 나타나며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답니다~!

 

후기 모더니즘은 단순함을 벗어난 하이테크 건축은 기술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장식, 역사적인 요소, 그리고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쓰는 방식으로 건축의 표현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어요👏🏻 이렇게 건축이 더 이상 하나의 '정답'만을 찾지 않고, 복잡한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맞춰 여러 가지 '해결책'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였답니다.

 

 

모더니즘 유토피아의 좌초
푸르이트-아이고 주택단지와 세계무역센터
(푸르이트-아이고:, 세인트루이스, 미노루 야마사키, 1954년 완공, 1972 철거), (세계무역센터: 뉴욕, 미노루 야마사키, 1973년 완공, 2001 9 11일 붕괴)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지어진 푸르이트-아이고 주택단지는 미노루 야마사키(일본계 2세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33개 동의 11층 아파트는 '미시시피 강의 맨해튼'이라 불리며 미래 도시의 희망으로 큰 기대를 모았죠. 1949년 연방 주택법의 지원을 받아 1954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건축가가 제안했던 낮은 층 건물, 놀이터, 조경 같은 꼭 필요한 편의시설들이 비용 문제로 빠지면서, 주민들의 삶의 질이 나빠졌어요. 특히 3개 층마다 서는 '스킵-스톱 엘리베이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용해야 했던 계단과 공용 복도는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 되었습니다. 결국 가난한 주민들만 남게 되는 '빈곤의 집중' 현상이 심해졌고, 1957 91%였던 입주율은 70년대에 65%까지 뚝 떨어졌죠😢💸

 

(좌측상단) 미노루 야마사키(Minoru Yamasaki 1912–1986) 푸르이트-아이고 주택단지 모형을 설명 / 출처: U.S. Department of Housing and Urban Development. (우측상단) 완공 직후의 푸르이트-아이고 주택단지 전경 / 출처: U.S. Geological Survey (좌측하단) 푸르이트-아이고 단지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교사, 1960년대초 / 출처: U.S. Department of Housing and Urban Development (우측하단) 황폐해진 푸르이트-아이고 / 출처: Bettmann Archive

 

결국 이 모더니즘의 상징인 주거단지는 1972 7 15일 철거되는 장면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됩니다📺 영국의 건축 이론가 찰스 젱크스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보며 "모더니즘 건축은 죽었다"고 선언했어요. 모더니즘이 내세웠던 '합리성' '기능성'만으로는 사람들의 복잡한 사회적, 심리적 요구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죠. 이 건물의 붕괴는 건축가들로 하여금 사람과 공동체를 생각하는 작은 규모의 재개발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답니다.

 

1972년 푸르이트-아이고 폭파 철거 장면 / 출처: U.S. Department of Housing and Urban Development.

 

또 하나의 미노루 야마사키가 설계하고 현재는 없어진 건축이 있는데, 1973년 완공된 세계무역센터(WTC) 있습니다. 이 빌딩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마천루로, 뉴욕의 경제권력과 미국의 세계적 위치를 상징하는 그 당시 세계에서 최고 높이의 건축이었어요. 하지만, 2001 9 11, 알카에다 테러 조직이 납치한 여객기 2대가 남타워, 북타워에 충돌하여 결국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는 미국이 중동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것을 이슬람 성지 모독으로 간주하였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정치,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정책도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이들은 결국 테러의 타켓으로 지구상에 가장 상징적인 모더니즘 건축물을 택하게 되었고, 현재 붕괴된 건축물 트윈 타워 자리에는 대형 정방형 분수와 희생자 명단이 새겨진 메모리얼이 만들어 졌고, 추모의 박물관이 지하에 들어섰습니다😥

 

(좌) 2001년 9월 11일, 항공기 충돌로 화염과 연기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 (우) 재건된 그라운드 제로와 9·11 메모리얼 / 출처: Associated Press

 

 

기술 낙관주의와 문화적 혁신
퐁피두 센터
(파리, 리차드로저스+렌조피아노+피터라이스, 1972)

 

(좌) 국제공모에서 당선된 렌조 피아노 (Renzo Piano, 1937- ) 와 리차드 로저스 (Richard Rogers 1933-2021), 피터 라이스 (Peter Ronan Rice 1935-1992) (우) 대형 강철 구조재 제작 과정 / 출처: Centre Pompidou Archives

 

파리 한가운데 위치한 퐁피두 센터는 1970년대 건축 혁명의 상징이에요! 건물의 구조와, 설비 등 모든 기능적인 요소들을 바깥으로 드러낸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건축의 모습이었습니다. 서쪽 외벽을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는 방문객들에게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해주었어요🤩 이 독특한 디자인은 주변의 유서 깊은 건물들과 너무나도 달라서 처음에는 논란이 되기도 하였고, 공사가 끝나지 않은 건축으로 오인 받기도 했습니다. '문화를 모두가 누릴 수 있게 하자'는 사회적인 꿈을 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혁신적인 디자인 솔루션을 통해 이루려고 한 대표적인 하이테크 건축인 것이죠~! 건물 안은 최대한 자유롭고 가변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벽이나 기둥 없는 공간을 만들었어요. 개관 이후 퐁피두 센터는 40년 넘게 1 5천만 명 이상이 다녀간 파리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답니다.

 

(좌측상단) 시공 과정의 퐁피두 센터 / 출처:Centre Pompidou Archives (우측상단) 완공 직후의 퐁피두 센터 전경 / 출처: Centre Pompidou / Philippe Migeat. (하단중앙) 퐁피두 센터의 전면 광장 / 출처: Centre Pompidou / Philippe Migeat

 

아울러 국제 현상설계 당시 김수근 건축가 출품한 제안도 흥미로운데 유럽 모더니즘과 동아시아적 공간 감각을 결합한 시도로 기술 중심의 하이테크 건축이 아닌 문화적 정체성과 도시 맥락을 고려한 작품이었어요. 당선안과는 대조적으로 수평적으로 펼쳐지고, 작은 스케일로 분절되어 있으며 공간이 마을과 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내부 마당 및 중정에서 다양한 이벤트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개념은 공간사옥(현 원서동 아라리오 미술관)을 통해 현실화되었답니다. 대조적인 두개의 건축물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좌) 김수근의 퐁피두 센터 제안 모형 (우) 김수근의 퐁피두 센터 설계안 단면도 / 출처: Space Group Archives.

 

 

조형의 극대화와 건축가의 비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시드니, 요른 웃존, 1973)

 

(상단중앙) 요른 웃존(Jørn Oberg Utzon, 1918~2008) 왼쪽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모형 / 출처: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좌측하단) 건설 중인 오페라 하우스 (1960년대 후반) / 출처: Australian Broadcasting Corporation Archives. (우측하단) 시드니 항만 위로 오페라 하우스의 전경 / 출처: Sydney Opera House Trust.

 

호주 시드니 항구에 마치 하얀 돛을 펼친 배처럼 떠 있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우아한 조가비 모양 지붕으로 20세기 건축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죠. 요른 웃존이 1957년 디자인 공모전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혁신적인 설계안으로 당선되었는데, 심사위원이었던, 모더니즘의 거장인 미스 데어 로에는 그의 안을 만족해 지 않았지만, 다른 심사 위 원인 에로 사리넨은 그를 천재로 묘사하며, 이 획기적인 조형이 당선되는데 역할을 하였습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들로 이루어진 '' 지붕은 마치 공을 8등분한 듯한 독특한 모양인데, 이는 철저한 구조 분석과 창의적인 공법 덕분에 가능했답니다. 예술적인 상상력과 최첨단 기술이 만나 성공을 이룬 멋진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좌) 오페라 하우스의 측면 전경 / 출처: Wikimedia Commons (우) 오페라 하우스의 전면 광장 / 출처: Cion Hong

 

하지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짓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어요. 처음 지질 조사가 정확하지 않아 땅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계획에 없던 700개의 강철 콘크리트 기둥을 박아야 했어요🚧 원래 4년 만에 700만 호주 달러로 지을 계획이었던 이 프로젝트는 결국 14년이나 걸렸고, 무려 1 2백만 호주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이 들면서 예산을 훨씬 초과했어요. 공사 도중에 극장 수를 2개에서 4개로 바꾸는 등 요구사항이 계속 바뀌면서 계획을 수없이 고쳐야 했답니다. 결국 요른 웃존은 창의적인 자유를 제한하자 이에 반발하여 1966년 사임한 후 2008 90세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한반도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를 직접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좌) 오페라 하우스 지붕을 덮는 세라믹 타일의 세부 모습 / 출처: Cion Hong (우) 콘서트홀 내부 / 출처: Sydney Opera House Trust.

 

197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문을 연 이 건물은 곧 시드니의 상징이자 호주의 자랑이 되었고,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건축가는 2003년 노년의 나이로 프리츠커상을 받아 설계자로서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브루탈리즘 양식의 미학과 도시 재건의 이상
런던 바비칸 센터
(런던, 피터 챔벌린, 제프리 파웰, 크리스토퍼 본, 주거단지 1970년대 완공, 바비칸센터(문화시설) 1982년 개관)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런던 시내의 크리플게이트 지역에 이상적인 미래 도시가 구축하고자 했는데, 챔버린, 파웰, 본 건축가 팀이 설계한 이 초대형 복합 단지는 브루탈리즘 건축의 백미로 꼽힌답니다.

 

(좌) 건설 현장의 피터 체임벌린(Peter Chamberlin, 1919-1978) / 출처: Barbican Centre Archives (우) 계획 모형(1960년대) / 출처: City of London Corporation Archives

 

데크 위에 주거 공간과 문화 시설이 함께 있는 실험적인 공간을 만들려 했어요. 2000여 채의 아파트, 테라스형 주택, 호수 정원, 공중 보행로로 이루어진 거대한 콘크리트 미로였죠. 이런 시도는 전쟁 후의 낙관적인 분위기와 진보적인 정치의 시대를 반영하며, 계급 없는 현대를 향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이념과도 연결된답니다!  

 

바비칸 센터의 항공뷰 / 출처: Google Earth

 

브루탈리즘 건축은 '차가운 콘크리트의 한계'를 드러내며, '거칠고 위압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콘크리트 고층 건물 건축이 반사회적인 행동을 유발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는데, 이는 건축물의 물리적인 형태가 사회적인 경험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좌측상단) 주거동과 수변 공간 전경 / 출처: Barbican Centre official website (우측상단) 바비칸 센터 수변 공간과 테라스 / 출처: Barbican Centre official website (좌측하단) 바비칸 센터 메인 플라자와 분수 광장 / 출처: Barbican Centre official website (우측하단) 바비칸 센터 내부 로비 공간 / 출처: Barbican Centre official website

 

바비칸은 '도시 속의 도시' 또는 '도시 마을'로서 주변 역사와 신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잘 관리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 런던 방문 시 꼭 방문해 볼만한 시대적 건축입니다🥰

 

 

시(詩)를 담은 건축
제주대학교 옛 본관과 모더니즘의 정수 삼일빌딩
(제주대학교 본관: 제주도, 김중업, 1970년 완공, 1995년 철거), (삼일빌딩: 서울, 김중업, 1970년 완공, 2020년 리모델링)

 

(좌) 건축가 김중업(1922-1988) (우) 제주대학교 본관 1, 2층 평면도 / 출처: 김중업건축박물관

 

대한민국 최남단 제주도에서도 뜻깊은 건축물이 하나 탄생했습니다. 바로 제주대학교 옛 본관 건물이예요. 르 코르뷔지에의 한국인 제자였던 건축가 김중업은 당시 제주대학은 국립대로 승격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교육의 새 희망을 심고자 이 본관 건축이 진행되었습니다. 4층짜리 건물 전체가 빚은 부드러운 곡선은 제주 바다와 바람을 형상화한 듯했고, 1층 현관은 활짝 펼친 조개껍질처럼, 2~3층을 잇는 후면 경사로가 아름답게 만들어졌죠.

 

완공 당시 제주대학교 본관 전경 / 출처: 김중업건축박물관

 

세월이 지나 바닷가에 위치한 특성상 해풍과 바닷모래를 사용한 콘크리트가 부식되고 심각한 누수로 건물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어요😨 1980년대 초 제주대학교 캠퍼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후 방치되면서 건물이 더욱 낡아갔고, 결국 1995년에 철거되어 제주 건축계에 큰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건물 하나가 없어진 것을 넘어, 빠르게 근대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 '근대 건축 유산'의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졌는데요, 최근 들어 2022년 김중업 탄생 100주년과 제주대 개교 70주년을 맞아 옛 본관을 다시 짓거나 재현하려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례는 건축 유산 보존이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좌) 본관 진입부의 곡선 램프 디테일 / 출처: 김중업건축박물관 (우) 서울 종로의 삼일빌딩 전경 / 출처: 삼일빌딩 보존추진위

 

김중업 건축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 1970년 준공된 삼일빌딩입니다. 지상 31, 높이 114미터에 달하는 건물로, 1985 63빌딩이 들어서기 전까지 15년 동안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의 위용을 자랑했답니다👏🏻🌟 박정희 정부 시절 고도성장을 이루며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던 경제 발전의 랜드마크였죠~! 건축주인 김두식 회장은 이 건물을 민족의 자존심으로 삼겠다는 포부로 3·1정신을 기리고자 층수도 31층으로 맞추었다고 알려져 있고, 국내 최초로 철골구조와 전면에 유리 커튼월 공법을 시도하였습니다. 김중업 건축가가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임에도 미스 반 데어 로에 스타일(시그램 빌딩, 뉴욕)을 택한 것은 당시 한국 사회가 추구했던 '근대화' '산업적인 위용'이라는 현실적인 요구에 건축가가 응답한 결과로 생각됩니다.

 

(좌) 삼일빌딩 파사드 / 출처: 삼일빌딩 보존추진위 (우) 삼일빌딩 파사드 디테일/ 출처: 서울시 기록원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과 건축의 다양성 확장

정리하자면 모더니즘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된 후 건축적인 정체성 혼란과 새로운 탐색이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다양한 스타일과 실험이 함께 존재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함께 건축적인 다양성을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죠. 이는 건축이 더 이상 하나의 이념에 갇히지 않고, 변화하는 사회적, 문화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답니다…! 1970년대는 건축이 '문제 해결'의 도구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개체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문화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시대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예술적인 행위로 진화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편은,

새로운 형식의 건축이 등장하니

많.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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