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에디터 H입니다. 😊
AI가 설계를 돕는 시대,
그럼에도 사람이 묻고 해석해야 할
‘의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펜과 알고리즘 사이에서
처음 Grasshopper(그래스호퍼: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알고리즘 기반의 3D 프로그래밍 툴)를 접한 건 자하 하디드 사무소에서였다. 유기적인 곡면을 만든다는 사실도 신기했지만, 그보다 더 낯설었던 건 그 곡선을 수치로 제어한다는 개념이었다. 나에게 디자인이란 펜으로 감각을 따라가는 일이었지, 숫자와 알고리즘으로 조정하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경험은 내게 단순한 도구 이상의 질문을 던졌다. '도구가 바뀌면 디자이너의 역할도 바뀌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조병수 교수님의 사무실에서 현대자동차 연수원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건축물의 물리적·기능적 정보를 3D 모델로 통합 관리하는 디지털 설계 기술)을 배우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3D 모델링을 넘어, 건축이 데이터의 집합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요구했다. 그 안에서 나는, 디자이너가 더 이상 '선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논리와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체감했다.
실리콘밸리에서 마주한 기술의 전제
그리고 지금, 나는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있다. 회의실에서, 카페에서, 이메일과 슬랙 채널에서 매일 오가는 단어들—AI, 자동화, 시뮬레이션, 디지털 트윈(현실의 사물이나 시스템을 가상 공간에 똑같이 구현한 디지털 복제본). 이곳에선 기술은 선택이 아닌, 전제조건이다. 설계가 시작되기 전, 이미 프로젝트의 일부는 시뮬레이션과 데이터를 통해 예측 가능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처음엔 거부감이 컸다. 기술은 어딘가 창작의 반대편에 있는 듯했고, 나는 여전히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에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2024년 초, 빠듯한 일정 속에서 개발사업 제안서를 맡게 되며 생각이 달라졌다. 당시 디자인 프린시펄은 말했다. "이번엔 AI를 써보자."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팀원은 나 혼자였고, 일정은 빠듯했다. 우리는 막 Stable Diffusion(스테이블 디퓨전: 텍스트를 입력하면 이미지를 생성해주는 AI 모델)을 사내 테스트 중이었고, 나는 AI를 활용해 단 하나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수십 개의 조감도를 생성했다.
사람의 언어를 회복하는 설계자
기술은 언제나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최근 애플은 ‘'Illusion of Thinking'(생각한다는 착각)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 하나를 발표했다. 해당 논문은 슈퍼 인텔리전스 개발이 왜 아직은 요원한 일인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AI가 문제를 단계별로 ‘생각’하며 푸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규칙의 조합일 뿐이며, 복잡한 논리 문제 앞에서는 정확도 붕괴(collapse in accuracy) 현상을 보인다”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은 건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술은 강력하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왜 이 형태인가?', '이 공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흐름은 어떤 감정을 유도하는가?' 이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사이드워크랩스(Sidewalk Labs)를 생각한다. 대학원 시절, 가장 일하고 싶은 회사로 손꼽히던 곳. 세계 최초의 스마트시티라는 비전을 품고, 토론토 수변에 '퀘이사이드'라는 도시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프라이버시 문제, 도시 거버넌스의 불신, 기술의 독점 우려. 기술은 도시를 구성했지만, 사람을 설득하진 못했다.
도시계획가, 건축가, 설비 엔지니어, 정책가, 시공자 - 모든 언어가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만으로 완성된 도시는 설득력을 갖기 어려웠던 것이다.
AI 시대의 핵심은 오히려 ‘전문성의 재정의’에 있다. 수평적 통합보다 중요한 것은, 각 영역이 자기 층위에서 정확한 기준과 언어를 갖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건축가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진다. 기술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Seeing the Unseen)이 중요하다.
법규, 기술, 정서, 경험, 효율, 의미라는 다층적인 언어 속에서 무엇을 해석하고,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지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다. 우리는 이제 기술이 제시하는 수많은 옵션들 중에서 '왜 이 방식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 현장의 최첨단 조력자들
나는 다양한 도구들을 실험하고 있다. 주변 실무자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들으려고 한다. 뉴욕의 빌드엑스포에서는 드론 기술이 현장에서 측량과 공정 추적에 활용되며 시공 정확도와 속도를 크게 개선했다. 하루 단위로 기록된 데이터는 디지털 트윈에 연동되어 현장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고, 관리자와 디자이너 모두가 그 정보를 공유하며 의사결정을 진행하고 있다. 드론은 이제 단순한 관찰 도구가 아니라, 데이터 기반 시공관리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았다.
로보틱스 기술도 낯설지 않다. 줄눈을 튀기며 일일이 작업도선을 만들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대형 인테리어 회사인 겐슬러에서 일하는 선배 디자이너는 ‘이제 건설로봇이 현장에서 설계 도면을 바닥에 자동 인쇄하고, 시공자는 이를 기준으로 작업을 이어간다’고 말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일부 현장에서는 이미 이 기술이 실험적으로 도입되고 있으며, 엔비디아와 테슬라는 로보틱스와 Physical AI(물리 인공지능: AI가 가상 환경을 넘어서 실제 물리 세계에서 직접 움직이고 반응하도록 설계된 기술)를 핵심 성장축으로 삼고 있다
SOM은 스탠퍼드 대학교와 함께 AR/VR 기술을 활용한 벽돌 시공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이는 전통 기술을 가진 장인과 최신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작업자 간의 시공 차이를 이해하고, 기술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시공자의 눈앞에 투영되는 디지털 도면은 단지 시공 보조 장치가 아니라, 노동과 설계 간의 간극을 해소하는 새로운 협업 언어로 작동한다.
작업자는 VR 헤드셋을 쓰고, 눈앞에 펼쳐지는 디지털 설계도를 따라 실제 시공을 진행하며, 다른 공간에서는 숙련된 마스터 빌더가 오랜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건축 작업을 정교하게 이어간다. 건축가는 이 두 작업자의 작업 방식을 디지털 모델로 확인하며, 설계와 시공 사이의 차이를 세밀하게 맞춘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디지털 기술과 장인의 손길이 함께 활용되면서, 기술과 경험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건축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다.
협업 방식도 변하고 있다. 최근 내가 참여한 공항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에서는, 100명 이상의 설계 인력이 실시간으로 모델을 공유하며 도면을 수정하고 검토하는 구조로 일했다. 이 과정에서 Revit과 연계된 Revitzo(CAD*도면, PDF 파일, 3D 모델을 자유롭게 전환하며 직관적인 UI를 통해 협업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도구 플랫폼)을 사용했고, Verity(건설 품질 검토 소프트웨어), Naviswork(3D 모델 검토 및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Trimble Connect(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3D 모델과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소통하는 도구) 같은 다양한 모델 중심의 클라우드 플랫폼 또한 이용되고 있다.
*CAD: 설계자가 종이와 펜 대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도면을 그리는 방식
2D와 3D가 동시에 인용되는 UI를 통해 충돌 감지와 설계 피드백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라졌다. 과거라면 각 팀이 순차적으로 도면, 모델링, 간섭을 수정했을 과정이 이제는 동시에 수행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새로운 도구의 도입이 아니라 소통 구조 자체가 변화함을 보여준다.
이미지를 영상화하는 Image-to-Video 기술과 2D 영상에서 시점을 재구성하는 Video Depth AI를 통해 점차 감각적 공간 시나리오도 빠른 시간 내에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투시도로 소통되던 실제 공간에서의 동선 흐름, 시야의 개방감 등을 단시간에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발주처나 비전문가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이미지보다 훨씬 직관적인 이해를 제공하며, 공간적 공감대를 빠르게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https://youtu.be/u4E98RpviR4?feature=shared
의미의 설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오늘날의 설계자는 감각과 판단을 동시에 요구받는다. 알고리즘이 만든 수백 개의 이미지 중 가장 인간적인 것을 고르는 감각. 자동화된 분석에서 결핍된 가치를 읽어내는 시선. 설계자는 기술과 사람, 시스템과 의미 사이를 잇는 해석자여야 한다. 단순히 효율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이 프로젝트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CAD가 대중화되기까지 40년이 걸렸고, BIM도 논의 속에서 서서히 확산되었다. AI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이 흐름을 따라가는 동시에, 그 속도와 방향을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기술의 흐름을 이해하면서도, 사람의 속도에 맞는 설계 언어를 지키는 것. 그것이 설계자에게 남겨진 숙제다.
설계는 이제 수많은 언어와 조건이 충돌하는 공간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 조건들을 정리하고, 모순을 조율하며, 결국 하나의 설계로 통합해야 한다. 그것이 설계자의 일이다. 그리고 그 설계는 단지 도면이 아닌, 판단과 감각, 철학의 결정체여야 한다. AI가 설계를 돕는 시대에도, '의미의 설계'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첨단 기술 앞에서도
‘사람다움’은 여전히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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